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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국가 대항전/클럽 대항전

‘만족을 모르는 괴물’ 바이언의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열망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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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어를 들고 트레블을 완성하며 환호했던 바이에른 뮌헨 시절 슈바인스타이거.

유럽의 엘리트와 권력에 굶주린 슈퍼 클럽이라는 개념이 확립된 2010년 정도보다 훨씬 더 전부터, 유러피언 컵은 바이에른 뮌헨이 그들의 한 시즌과 감독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이 대회에 대한 바이언의 집착은 다른 사람들에게 종종 특권의식에 물든 클럽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승리에 대한 거의 병에 가까운 집착을 항상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현재는 바이언의 임원으로 활동 중인 전설적인 키퍼 올리버 칸은 이 클럽을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라고 칭했다. 이 괴물들은 가장 큰 대회를 우승해야 잠시 동안 내면의 평화를 찾는 항상 배가 고픈 클럽이다.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바이언의 강한 열망은 언제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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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계속해서 수포로

1962년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바이언(뮌헨 내의 두 빅클럽들 역주: TSV 1860 뮌헨과 바이에른 뮌헨 중 더 자본주의적이지만 덜 성공적이었던 클럽)은 새로운 리그에 입성시키기엔 그리 중요하지 않은 클럽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복수의 칼날을 조금씩 갈았다. 14년 후, 바이에른 뮌헨은 유러피언 컵 3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으로 정점을 찍은 후에는 내리막밖에 없었고, 이는 다시 한번 유럽 대항전 성공의 달콤함을 맛보려는 그들의 병적인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25년 간 바이언은 국내 리그에서의 막강한 기반을 확고히 했으나 유럽 정상에 오르려는 노력은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양상에는 구조적인 요소가 있었다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로 소박하게 운영되던 자급자족 스타일의 클럽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클럽 성적에 투자하는 모델이 제공하는 재력을 이길 수 없었고, 후에는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도 우승을 내줬다 하지만 이적시장에서의 어리석은 결정들도 이에 일조했다. 바이언은 이후 유러피언 컵 결승에 3번이나 도달했지만, 모두 정말 극적인 패배를 내주며 우승에 실패했다.

 

1982, 그들은 네덜란드의 로더럼에서 아스톤 빌라와 맞붙어 경기를 지배했으나, 결국 1-0으로 패했다. 당시 뮌헨의 감독이었던 팔 체르너이는 점유율 축구라는 판을 짜왔고, 트로피를 내준 뒤 낙심해 다음 날 있었던 바이에른 지역의 공식 세레머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1년 뒤에 팀을 떠났다.

 

5년이 더 흐르고, 바이언은 비엔나에서 포르투에게 2-1 역전패를 당했다. 다시 한번, 유러피언 컵 결승 패배는 감독 경질의 시그널로 작용했다. 우도 라텍은 3년 연속 마이스터 샬레(분데스리가 트로피)를 들었음에도 사임했다. 그의 후임 유프 하인케스는 두 개의 리가 우승컵을 추가해 클럽의 트로피 캐비닛을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1990년 유럽 전역을 지배한 AC 밀란에게 4강에서 밀려났다.

 

내년에 우리는 유러피언 컵을 따낼 겁니다. 전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스트라이커(하인케스)는 뮌헨의 중심지 마리엔 광장의 군중들 앞에서 왕좌를 약속했지만 더 심한 가슴앓이가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 다음해에도 바이언은 4강에서 탈락했다. 이번에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였다. 하인케스는 이 불상사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몇 달 후에는 바이언에게 엄청난 낭떠러지를 선사했다. 그들은 1991-92 시즌을 10위로 마쳤다.

유럽 대항전이 감독 평가 기준으로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1999년 캄프 누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감독 부임 첫 시즌이었고 클럽 임원진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극적인 역전 우승에 그보다는 신을 탓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바이언은 챔피언스리그 결승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발렌시아를 물리치며 빅이어를 들면서 믿음의 보상을 확실하게 받았다.

2001년, 바이언은 빅이어를 손에 넣었다.

결국에는 그 가려웠던 곳을 시원하게 긁고 난 뒤, 그들은 알리안츠 아레나로의 홈구장 이전에 따른 재정적 이득을 취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구팀 5위 내에 드는 클럽이 되면서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과는 바이언의 감독을 평가하는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펠릭스 마가트는 두 번의 더블을 달성했지만 그의 파워 풋볼이 챔피언스리그의 전술적으로 복잡한 팀들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자 경질됐다. 위르겐 클린스만의 결점은 바르셀로나 전 4-0 패배로 잔인하게 드러났고, 2010년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바이언은 당시 인테르에 2-0으로 졌다)까지 진출한 루이스 반 할도 그 1년 뒤에 다시 한번 인테르에 패해 16강에서 탈락하자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그 후 1990년대 초반의 절망을 안겨줬던 하인케스가 돌아와 바이언 2기를 시작했다. 클럽의 몇몇 파워브로커들은 하인케스에게 2012년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결승 첼시 전에서의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패배의 책임을 물었다.

첼시의 기적적인 역전 우승은 바이언 선수들을 낙담에 빠지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지지층은 확실히 부족해 보였고, 하인케스는 사임에 근접했다. 그러나 좀 더 차분한 분석가들은 선수단의 핵심 포지션에 몇 가지 보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홈에서의 첼시 전 패배가 팀 보강의 큰 요인으로 작용한 바이언은 하비 마르티네즈, 마리오 만주키치, 단테를 영입했고, 1년 뒤에는 웸블리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꺾으며 다시 빅이어를 들었다.

 

진짜 아이러니를 불러온 사람은 바이언이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서기 6달 전에 선임되어 우승 직후 클럽에 합류한 펩 과르디올라였다. 이 카탈란의 지고한 축구 철학은 3년 동안 클럽을 최정상에 머무르도록 해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바이언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에도 오르지 못했고, 펩은 그의 숙원 사업을 해결하지 못한 채 팀을 떠났다.

 

바이언은 카를로 안첼로티 하에서 훨씬 더 퇴보했다. 안첼로티는 2017-18 시즌 조별리그 파리 생제르맹 전에서 3-0으로 패배한 뒤 잘렸다. 하인케스는 4번째로 바이언을 맡기 위해 돌아와 그들을 4강까지 올려놓았으나 더 이상 팀을 책임지진 않았다.

 

니코 코바치는 중요한 부분에서 큰 손실을 입지 않고서도 더블을 달성했다. 챔피언스리그의 첫 토너먼트에서 리버풀의 손에 탈락했을 때 그의 형편없는 전술적 능력과 선수들의 분노가 드러났다. 더 심각했던 것은 코바치가 선수들을 아우토반 고속도로에서도 시속 200km를 달릴 수 없는 낡아 빠진 자동차에 빗댔다는 것이다. 불가피했던 그의 경질은 리가에서의 성공으로 잠시 연기됐을 뿐이다.

챔피언스리그는 모든 것

이제는 한지 플릭의 차례다.

 

코바치의 수석 코치였던 플릭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바이언이 16강 스탬포드 브릿지 첼시 전 3대0 대승을 거둔 뒤에야 이뤄졌다. 임원들은 플릭을 정식 선임하기 전에 유럽에서는 그의 축구가 통하는지 보기를 원했다. 55세 감독의 드레싱룸에서의 인기와 현재까지 바이언의 2020년 퍼포먼스를 보면 이번 달 리스본에서 별 성과를 내지 못해도 단기적으로 그에게 매우 큰 영향이 미치진 않겠지만, -하인츠 루메니게는 플릭이 이루지 못한 성과를 가져다줄 또다른 스타 감독들의 리스트를 살펴볼 것이다.

 

바이언은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분데스리가 8연패는 그들의 기준점을 하늘 높이 올려버렸다. 바이언에게 챔피언스리그는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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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Raphael Honigstein 2020.08.13

(사진: 디 애슬레틱)